헤드폰을 만져 본 일은 아주 옛날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주 어렸을 시적, 친척집과 우리 집에는 전축이 있었고, 그 전축 안에는 검은색 플라스틱 케이스 안에 들어있는 인켈 헤드폰 같은 물건들은 그저 바라보기만 할 뿐, 내가 들어볼 만한 대상이 아니었다. 일단 헤드폰이 너무 커서 머리에 맞지를 않았으니까. 어린 시절의 나에게는 말이다.
중고등학교 때에는 헤드폰을 접할 수가 없었다. 그 때 당시에 포터블 기기는 너무 비쌌고 어머니께서는 공부나 하지 뭐한다고 대중음악을 듣냐고 평범한 부모님으로써 대중음악은 나쁜 것이라는 탓을 하셨다. 그래서 포터블 기기 없는 내가 있었을 리가 없지.
대학교때는 파나소닉 카세트를 들고 다니면서 음악을 들었으나, 헤드폰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아니 아예 모르고 있었다.
그러했던 내가 헤드폰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된 것은 피씨 스피커 생활을 시작하면서이다. 취직하고 컴퓨터를 장만했는데 소리를 듣고자 스피커를 샀더니 내장 오디오에서 잡음이 섞여 나온다는 것을 알았고, 사운드 카드를 바꿨더니 스피커가 문제가 있다는 걸 깨닫게 된 이후다. 참고로 7년 전에 구매했던 오디오트랙 프로디지 5.1 LT 사운드 카드는 지금도 내 컴퓨터에 물려서 디지털 출력을 내보내주고 있다. 좀 더 좋은 소리, 맘에 드는 소리를 찾기 위해서기도 했지만, 문제는 소리가 너무 답답하고 맘에 안 들어서 맘에 드는 소리를 찾아나가는 과정이었다. 그저 좋은 소리에 홀려서라기보다는 소리가 맘에 안 들었다는 것이 더 컸다.
일단 스피커와 오디오 기기를 바꾸는 과정을 통해서 더 좋은 소리를 찾아보고자 했지만, 피씨스피커닷컴을 통해서 헤드폰을 추구하는 헤드파이(Head-Fi)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접해본 사람들은 간단한 이유로 헤드폰보다는 스피커의 세계를 권했다. 그건 헤드폰보다 스피커가 가격대 성능비가 훨씬 좋고 공간감에서는 비교가 안 된다는 것이었다. 헤드폰 사용자들은 알고 있으면서도 그럼에도 헤드폰을 추구하는 바가 있었다. 그건 주변 사람에게 소음으로 방해가 되지 않고, 기기의 구성이 간단하며, 언제나 같은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장점 때문이었다.
나의 오디오 생활은 외장 사운드 카드 + 디지털 S/PDIF 케이블 or 광케이블 + 외장 DAC MSB LINK DAC III + 인터케이블 + 레가 브리오 인티그레이티드 앰프 + 레가 R1 이라는 조합으로 멈췄다. 이 이야기는 다음 블로그 글에서 계속하며..
하지만 포터블 기기에 대한 아쉬움은 남아 있었다. 특히 회사에서나 들고 다니면서 듣는 음악에는 아쉬움이 있었다. 당연히 일정 수준을 넘어가버린 오디오에 비해서 이어폰은 당연히 따라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젠하이저 MX400 같은 경우 해상력 등의 성능은 떨어지더라도 소리 자체의 완성도가 좋았기에 종종 들었지만 기타 몇몇 이어폰들은 어떻게 이런 소리를 듣나 싶을 정도로 별로였다. 유비코 ES303은 들어보면 스펙은 분명히 MX400보다 좋지만 소리의 완성도가 떨어져서 별로 듣고 싶지가 않았다. 지금은 아는 동생을 줘버렸을 정도로..
오픈형 이어폰의 끝판 대왕이라고 하는 OMX980은 해상력은 무지 좋아서 거의 스피커에 육박할 정도였지만 안경으로 인해 행거가 너무 불편했고, 이어폰은 탈착이 쉬워야 하는데 행거로 인해서 꼈다 뺐다 하기도 불편하고, 보관이 까다로웠다. 지금은 방출한 상태지만 만약 다시 한번 이어폰을 구한다면 꼭 OMX980으로 구해보고 싶을 정도로 맘에 드는 녀석이었다.
그 후 우연한 기회로 베이어다이나믹사의 이어폰을 하나 구하게 되었다.
http://goldenears.net/board/1155262
특가 행사도 했었고, 특성이 아주 좋다는 이야기에 들어보고 나서 깜짝 놀라게 되었다. 가격대비 당연히 우월한 스펙은 아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리가 아주 좋았다. 음악이 음악으로 들리는 느낌? 너무나도 편하게 음악을 들려주면서 즐길 수 있게 해주는 제품이었다. 젠하이저의 MX400과도 조금은 비슷한 느낌이기도 했으나 스펙 자체가 틀린 느낌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OMX980과 느낌이 아주 흡사했다. 참고로 두 제품의 가격차이는 약 20배 가량이 난다. 그래서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베이어다이나믹사에 대한 조사를 해보게 되었고, 베이어다이나믹사의 이어폰과 헤드폰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베이어다이나믹사의 이어폰은 이전에도 가성비가 좋아서 여러 차례 인터넷에서 이슈화 된적이 있었으나 조사해본 결과로는 뭔가 하나씩 아쉬운 제품이 있었고, 오히려 가장 최근에 나와서 내가 샀던 DTX11iE가 가장 결점이 적은 제품이었다. 계속 편하게 들으려고 했으나 선배가 넘기라는 이야기에 만 구천원에 무료 배송에 산 제품을 선배에게 이만원에 넘기고 나서 무얼 살지 한참을 고민을 하게 되었다.
베이어다이나믹사의 이어폰은 내가 산 제품 외에는 한가지씩 뭔가 모자란다는 점을 알았기에 (나가수에 DTX-100을 끼고 나오는 가수가 있다는건 나중에 알았지만) 결국은 헤프폰을 고민하다가 올라운드 타입의 레퍼런스 헤드폰 DT-880을 구매하게 되었다. 이전 같으면 안 샀을테지만 임피던스 32옴의 신형 모델이 나와서 아이폰에서도 충분히 울릴 수 있는 모델이 나왔기 때문이다.
소리를 들어보고는 정말 놀랐달까.. 뭐랄까.. 지금까지 오디오를 헛짓하면서 살아온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임피던스가 낮기 때문에 아이폰, 맥북, USB 사운드 카드 던간에 볼륨 몇 칸 안 올리고도 충분하고도 훌륭하고도 놀라운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단점은 너무 크고, 끼면 덥고, 비싸서 조심스럽고, 공간감이 스피커에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지만 정위감, 해상력 등등 모든 점이 놀라웠다. 몇 가지를 확실하게 버린 대신 나머지 많은 점들을 제대로 살린 제품이었다. 누군가가 기기를 추천해달라고 하면 앞으로 무조건 DT-880 32옴 임피던스 모델로 추천하고 싶을 정도로 맘에 들고, 벨벳 이어 패드는 수입사에 요청하면 유상으로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망가질 일이 없는 유닛이 찌그러지지 않도록 조금만 조심하면 반영구적으로 쓸 수 있는 모델이다. 독일 애들이 수공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내구성도 충분하리라 보고 있다. 실제로도 20-30년 이상 써온 사람이 있을 정도로..
다만 이 모델의 단점은 너무 커서 휴대가 불편하다는 것과 덥다는 것. 그래서 포터블용 휴대폰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포터블 휴대폰을 찾아보면서 좀 더 헤드폰을 깊게 이해하게 되었다.
- 헤드폰은 오픈형, 세미오픈형, 밀폐형이 있다.
- 헤드폰은 귀를 완전히 덮는 방식인 어라운드 방식과 귀 위에 컵이 올라가는 온 이어 방식이 있다.
- 헤드폰은 32옴 임피던스 모델이 오히려 드물며 대부분 250이나 600옴 등의 고 임피던스 모델이 많고, 이 경우 헤드폰 앰프를 필요로 한다.
- 아주 제대로 만들어진 헤드폰 앰프를 제외하며 대부분의 앰프는 오히려 음질을 떨어트린다. 뭐 당연한 얘기지만..
- 밸런스 인풋을 가지는 모델이 언밸런스 인풋 모델보다 모든 점에서 유리하지만 밸런스 아웃풋을 가지는 기기가 별로 없고, 헤드폰 자체가 밸런스 입력인 경우도 매우 드물다.
- 포터블 타입은 그 특성상 밀페형으로 밖에 만들수가 없고, 어라운드 타입이라도 유닛이 겨우 귀를 덮거나, 대부분이 온이어 방식이다.
- 밀폐형과 오픈형은 소리의 장단점이 있고, 밀폐형이 음감에는 좀 더 부족하다. 그래서 세미 오픈형이 있다.
- 포터블은 유닛 크기의 한계도 있고, 귀를 완전히 덮을 수 없기 때문에 실내형보다 부족하다.
결국 포터블형은 간편함과 좀 덜 덥다는 것을 제외하면 실내형보다 유리할 것이 하나도 없지만, 그 두 개의 점이 워낙 크기 때문에 포터블 형을 하나 구입하게 되었다.
젠하이저 HD25-1 II와 베이어다이나믹사의 T50P를 고민했지만 가격차이가 10만원인데다가, 헤드룸에서 두 개의 특성 곡선을 비교해본 결과 특성 곡선이 거의 같았기 때문에 t50p를 구입하게 되었다.
http://www.headphone.com/headphones/beyerdynamic-t50p.php
t50p는 일단 모양도 간결하지만 음압이 높다. dt-880보다 음압이 높아서 아이폰에서도 볼륨을 2-3칸만 올리면 충분한 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효율이 크다. 밴드는 가죽이다.
소리는 당연히.. 실내 거치형보다는 한참 떨어지지만 재밌는 점은 완성도는 다른 방식으로 높다. 즉 소리가 좀 메마르고 거칠고, 약간 착색도 있지만 소리 자체의 완성도는 다른 식으로 완성되어 있어서 좀 카랑카랑하고 밀도감 높은 강렬한 소리를 들려준다. 그래서 좀 더 비트감 있고 강한 음악을 들으면 너무 얌전한 dt-880보다는 또 다른 만족감이 있다. 그래서 가요를 들을 때도 괜찮고, 소편성 현악기에서도 소리가 나쁘지 않다. 언제든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